"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고대 로마의 이 격언은 21세기에도 국제정치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전혀 다른 꿈을 꾸었다. 그는 1795년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에서 인류가 이성과 도덕을 바탕으로 국제법을 만들고 국가 간 연맹을 형성한다면 전쟁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사상은 훗날 국제연맹과 유엔(UN)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231년이 지난 오늘,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며 유럽의 질서를 흔들고 있다. 중동에서는 미국, 이스라엘, 이란을 둘러싼 무력 충돌이 이어지며 확전의 불안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세계 곳곳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중국 역시 새로운 국제질서를 꿈꾸며 패권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유엔은 수없이 회의를 열지만, 전쟁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왜일까?
칸트는 국가의 제도를 바꾸면 평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제도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력한 존재를 충분히 예견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인간을 '의지(Wille)'라는 끝없는 욕망의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무언가를 이루면 잠시 만족하지만, 곧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낸다. 욕망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개인에게는 성공과 부, 명예가 욕망이라면, 국가에게는 영토와 자원, 군사력, 패권이 욕망이 된다.
러시아가 말하는 안보 뒤에는 영토가 있고, 미국이 말하는 자유 뒤에는 국제질서의 주도권이 있으며, 이스라엘과 이란이 주장하는 정의 뒤에는 생존과 패권이라는 욕망이 공존한다.
국가는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욕망'을 실현한다. 이것이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이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말했다. 한 국가가 군사력을 증강하면 다른 국가는 더 큰 군사력을 갖추려 한다. 한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하면 다른 나라 역시 핵무장을 원한다. 결국 욕망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두려움을 만들며, 두려움은 전쟁을 정당화한다.
오늘날 세계의 군비 경쟁은 지라르가 말한 '모방욕망'이 국제정치에서 거대한 규모로 재현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 안에는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인 에로스(Eros)뿐 아니라 파괴를 향하는 죽음충동인 타나토스(Thanatos)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결국 문명은 인간을 발전시켰지만, 인간 내면의 파괴 본능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만드는 손이 미사일도 만들고, 우주선을 발사하는 기술은 극초음속 무기도 함께 개발한다. 기술은 진보하지만, 그에 비례해 인간이 반드시 성숙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은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도 탄생한다"고 말했다. 전쟁 역시 그렇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 버튼 하나를 누르는 사람, 명령서를 작성하는 사람, 무기를 판매하는 사람, 예산을 승인하는 사람 모두 자신의 역할만 수행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의 삶을 무너뜨린다.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 일상이 모여 전쟁이 된다.
유엔은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평화기구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큰 한계도 안고 있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은 평화를 지킬 책임과 함께 거부권이라는 막강한 권한도 갖고 있다. 평화를 위해 만든 제도가 힘의 논리에 종속되는 순간, 칸트가 꿈꾸었던 보편적 이성은 현실 정치 앞에서 흔들린다.
국제법은 존재하지만 강제력은 부족하다. 평화는 선언되지만 실현되지 않는다. 어쩌면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실패한 철학이 아니라, 인류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윤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를 만들고, 화성 탐사를 준비하며, 인간의 유전자를 편집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오래된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이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은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을 낳기 때문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허무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국가도 다르지 않다. 더 많은 영토를 얻으면 더 많은 안보를 원하고, 더 많은 안보를 얻으면 더 큰 패권을 원한다. 이처럼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그래서 하나의 전쟁이 끝나도 또 다른 전쟁은 시작된다.
이 지점에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단순한 국제정치 이론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바뀐다.
인간은 과연 평화를 원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평화를 이용하는 존재인가.
이 질문 앞에서 유엔도, 국제법도, 군사동맹도 완전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영구평화는 국제기구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전쟁은 끝나도 평화는 오지 않는다.
칸트는 평화를 미래의 희망으로 남겼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욕망의 허무를 이야기했고, 프로이트는 인간 내면의 파괴 본능을 경고했으며, 지라르는 욕망의 모방을 설명했고,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악을 만든다고 증언했다. 21세기의 전쟁은 이 다섯 철학자의 통찰이 동시에 현실이 된 시대를 보여준다.
인류는 달에 갔지만, 욕망을 넘어서는 데에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어쩌면 영구평화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아직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I 윤재은(Yoon Jae Eun)
건축과 예술, 문학,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인간과 공간의 본질을 탐구해 온 공간철학자이자 건축가이다. 대학에서 31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헌신하였고, 그 공로로 국가로부터 근정포장을 수훈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홍익대학교 건축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 「해체주의 건축의 공간철학적 의미체계」를 통해 ‘공간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했으며, 이를 통해 직관과 반성을 바탕으로 공간과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철학적 사유 체계를 제시하였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ESG위원회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약 2년 7개월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이사회 의장과 비상임이사, LH ESG 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2022년 대한민국 ESG소통 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가치 확산에 기여하였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UC버클리) 건축대학 뉴미디어센터 방문학자로 디지털 건축을 연구하며 미래 건축과 기술, 인간 감성의 융합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장편소설 『비트의 안개나라』, 시집 『건축은 나무다』·『건축은 선이다』, 건축 전문서 『Archiroad』 1권(Hyun)·2권(Sun)·3권(Hee), 철학 인문서 『철학의 위로』, 공동연구 저서 『시그널 코리아 2024』·『시그널 코리아 2025』 등이 있으며, 도시, 건축, 철학, 문학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통찰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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