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년의 계절에 찾아온 기후위기, 수확철 농업의 경제학
- 황금빛 들녘의 역설…수확철 기후재해와 식량안보
가을은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계절이다. 황금빛으로 물든 논과 과수원은 농민에게 땀과 노력의 보상이자 국민에게는 풍요로운 밥상을 약속한다. 그러나 기후위기가 일상이 된 오늘날, 수확의 계절이 반드시 풍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수확을 앞둔 벼가 집중호우에 쓰러지고, 장기간 이어지는 가을비에 이삭에서 싹이 트며,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병해충이 확산한다. 풍년을 기대했던 농민에게 가을은 오히려 한 해 농사의 손실을 확인하는 계절이 될 수 있다.
수확철 기후재해, 농민의 땀을 빚으로 바꾸다
벼농사는 수확 직전까지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 태풍과 집중호우로 벼가 쓰러지는 도복이 발생하면 수확 작업이 어려워지고, 이삭이 물에 잠기거나 비를 장기간 맞으면 수발아와 품질 저하가 발생할 수 있다. 수확이 늦어지면 농기계와 인력 투입 비용이 늘어나고, 수확한 벼의 건조와 보관에도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쌀의 수량뿐 아니라 품질과 판매가격까지 동시에 타격을 받는 것이다.
과수와 밭작물도 예외가 아니다. 수확기 강우는 과실의 열과와 낙과를 유발하고, 습한 환경은 각종 곰팡이성 병해의 발생 위험을 높인다. 농산물의 상품성이 떨어지면 출하량이 줄어들고, 선별·폐기 비용까지 늘어난다. 농민은 종자와 비료, 농약, 농기계 임차료 등 이미 지출한 생산비를 회수하지 못한 채 다음 작기를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피해가 단순히 농업 생산량의 감소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 지역에서 수확량과 상품성이 동시에 떨어지면 산지 출하가 감소하고 도매가격과 소비자물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물론 가격 변동에는 재고, 수입, 유통 여건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지만, 기후재해가 농산물 공급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기후위기의 경제학은 여기서 시작된다. 농민이 감당하는 생산 손실은 농가의 소득 감소로 이어지고, 그 부담은 농업의 지속가능성과 국민의 식량안보 문제로 확장된다. 수확철의 기후재해는 자연현상이면서 동시에 경제적 위험이다.
농업재해보험, 기후위기의 안전망이 되어야 한다.
기후재해가 반복될수록 농민 개인의 노력만으로 피해를 예방하고 소득을 지키기는 어렵다. 재해에 대비한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적기에 수확하려 해도, 광범위한 지역에 집중호우가 내리거나 수확기에 비가 장기간 이어지면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농업재해를 농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않고 사회적으로 분담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농업재해보험은 이러한 위험을 분산하는 핵심적인 안전망이다. 그러나 보험이 실제 현장에서 충분한 보호 기능을 발휘하려면 보장 범위와 피해 판정, 보험금 지급의 실효성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작물과 재배 방식에 따라 피해 양상이 다르고, 같은 강우에도 생육 단계와 지역 여건에 따라 피해 규모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수확기에는 수량 감소뿐 아니라 품질 저하와 상품성 하락이 농가소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외관상 수확이 가능하더라도 품질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낮은 가격에 판매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따라서 재해보험은 생산량 중심의 손실 평가를 넘어 품질 저하, 추가 수확 비용, 건조·선별 비용 등 실제 경제적 손실을 합리적으로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보장 항목은 작물별 피해 특성과 손실 산정의 객관성, 보험료 부담을 함께 고려해 설계해야 한다.
재해보상 체계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보험에 가입하지 못했거나 보험으로 충분히 보상받기 어려운 농가, 대규모 재해로 경영 기반 자체가 흔들린 농가에 대해서는 공적 지원과 긴급 경영안정 대책이 적절히 연계돼야 한다. 피해 조사와 보상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하고, 지역별·작물별 피해 자료를 축적해 보상 기준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농민이 피해를 입증하는 데 과도한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도록 위성영상과 기상관측, 농업기상정보 등 객관적인 자료를 활용하는 방안도 확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사후 보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수확기 강우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고, 지역별 수확 적기 정보를 제공하며, 농기계 공동 이용과 건조·저장시설을 확충하는 등 예방과 대응에 대한 투자를 병행해야 한다. 기후위험을 미리 줄이는 것이 피해가 발생한 뒤 보상하는 것보다 농가와 사회 전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시대, 풍년의 기준을 바꾸자
기후위기 시대의 농업정책은 생산량을 늘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안정적인 생산과 소득, 지속가능한 토양과 물 관리, 재해에 견디는 농업 기반을 함께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기상·농업·재난·금융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고, 농업재해보험과 재해보상, 기후적응 투자를 하나의 통합적인 위험관리 체계로 발전시켜야 한다.
기업과 유통업계의 역할도 중요하다. 농산물의 외관과 규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거래 관행은 기후재해로 품질이 다소 저하된 농산물의 판로를 좁힐 수 있다. 안전성과 식용 적합성을 전제로 한 합리적인 품질 기준, 계약재배와 장기 구매 협력, 산지의 건조·저장시설 지원은 농가의 손실을 줄이고 공급망의 회복력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는 환경(Environment)과 사회적 책임(Social), 책임 있는 경영(Governance)을 실천하는 ESG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농민은 기후변화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기후위기 대응의 중요한 주체다. 농민에게 기후위험을 홀로 감당하라고 요구하면서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기대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기후재해로 인한 손실을 공정하게 분담하고, 피해를 예방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인프라에 투자하며, 농업의 가치를 시장과 정책이 함께 인정해야 한다.
풍년은 단순히 곡식이 많이 생산되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농민이 정당한 소득을 얻고, 소비자가 합리적인 가격에 농산물을 공급받으며, 다음 해에도 농사를 이어갈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야 진정한 풍년이라 할 수 있다.
황금빛 들녘을 지키는 일은 농민만의 과제가 아니다. 기후위기 시대의 농업을 지키는 것은 식량안보를 지키고 국민경제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을 넘어, 기후재해가 닥쳐도 농업과 농민이 무너지지 않도록 만드는 제도적 준비다. 그것이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새롭게 세워야 할 수확의 경제학이다.
덧붙이는 글 ㅣ 남재철 (서울대학교 특임교수, 前 기상청장)

기상청장을 역임하며 국가 기후 관측과 재해 대응 정책을 총괄했다. 국립기상과학원장, 수도권기상청장, 기상청 차장 등을 거치며 기상·기후 분야 전반에서 정책과 연구를 수행해 왔다. 세계기상기구(WMO) 집행이사 및 대기과학위원회 부의장을 맡아 국제 기후 협력에도 참여했다.
마르쿠스 Who’s Who 과학기술인명사전에 등재된 바 있으며,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6번째 대멸종 시그널, 식량 전쟁』의 저자이며, 현재 기후변화 대응, 기상재해, 식량안보 분야에서 연구와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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