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보홀섬에 펼쳐진 수천 개의 원뿔형 언덕이 빚어낸 신비로운 풍경
- 바닷속 석회암이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거쳐 만들어낸 자연의 작품
[편집자 주] ESG코리아뉴스는 지구 곳곳에 숨겨진 경이로운 자연과 아름다운 풍경을 소개하는 기획 연재 〈아름다운 지구이야기〉를 선보인다. 오랜 세월 자연이 빚어낸 신비로운 지형부터 그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들의 이야기까지, 아름다운 풍경에 담긴 자연의 역사와 가치를 함께 들여다본다.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의 다채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자연의 소중함과 그 아름다움을 미래 세대에 온전히 전해야 할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필리핀 중부 보홀섬에는 크고 작은 언덕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독특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둥글게 솟아오른 언덕들은 크기와 높이가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 마치 누군가 땅 위에 하나씩 빚어 놓은 듯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어린아이가 그림책에 그려 놓은 산들이 현실에 나타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필리핀을 대표하는 자연 명소 가운데 하나인 '초콜릿 힐스(Chocolate Hills)'이다.
이름만 들으면 초콜릿과 관련된 특별한 장소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언덕을 뒤덮은 풀의 색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비가 내리는 계절에는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던 언덕들이 건기가 찾아오면 갈색으로 변하면서 마치 초콜릿을 한 덩어리씩 올려놓은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초콜릿 힐스가 자리한 곳은 보홀섬 중부의 카르멘(Carmen), 바투안(Batuan), 사그바얀(Sagbayan) 일대다. 이 지역에는 1,200개가 넘는 언덕들이 넓게 분포해 있으며, 자료에 따라 약 1,268개 또는 1,776개 등으로 소개된다. 언덕의 개수는 조사 범위와 집계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수많은 언덕이 비슷한 형태로 이어진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이색적이다.
언덕들은 대체로 원뿔이나 둥근 반구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낮고 완만한 언덕도 있고 주변보다 높게 솟은 언덕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반복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특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둥근 언덕들이 서로 겹치면서 마치 초록색 또는 갈색 물결이 이어지는 듯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신기한 모양의 언덕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초콜릿 힐스의 역사는 오늘날 보홀섬의 모습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 바닷속에서 시작된다. 이 지역의 기반을 이루는 암석은 주로 석회암으로, 오래전 바다에 살던 산호와 여러 해양생물의 껍데기, 골격 등에 포함된 탄산칼슘 성분이 쌓이고 굳어지면서 형성됐다.
이후 지각운동으로 석회암 지층이 육지에 드러나면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됐다. 오랜 세월 비가 내리고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면서 단단한 암석이 조금씩 녹고 깎이기 시작한 것이다.
석회암은 물에 서서히 녹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빗물이 대기와 토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면 약한 산성을 띠게 되는데, 이러한 물이 암석의 틈을 따라 스며들면서 석회암을 조금씩 녹인다. 물이 흐르는 곳은 낮아지고 상대적으로 단단하게 남은 부분은 높게 솟아오르면서 독립된 언덕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지질학에서는 이처럼 석회암이 물에 녹고 침식되면서 형성되는 지형을 '카르스트(Karst) 지형'이라고 부른다. 초콜릿 힐스는 이러한 카르스트 지형의 대표적인 사례로, 석회암의 성질과 지층의 구조, 오랜 풍화와 침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의 손으로 다듬은 듯 비슷한 모양의 언덕들이 사실은 오랜 세월 자연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 둥근 언덕 하나하나에는 바닷속에서 시작된 지구의 역사가 담겨 있는 셈이다.
초콜릿 힐스의 매력은 독특한 지형뿐 아니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가 충분히 내리는 시기에는 언덕을 뒤덮은 풀이 자라면서 주변이 온통 초록빛으로 변한다. 둥근 언덕들이 녹색 물결처럼 이어지고, 그 사이로 나무와 농경지, 마을의 모습이 어우러져 싱그러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비가 적게 내리는 건기에는 풀이 서서히 마르면서 언덕이 갈색을 띠기 시작한다. 햇빛의 방향과 강도에 따라 밝은 황갈색에서 짙은 갈색까지 다양한 색으로 보이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수많은 초콜릿 덩어리가 땅 위에 놓여 있는 듯하다.
보홀 지역은 일반적으로 12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비교적 건조한 시기를 맞지만, 실제 언덕의 색깔은 해마다 강수량과 기상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시기에 모든 언덕이 일제히 갈색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계절에 따라 색을 바꾸는 언덕들은 여행자들에게 서로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푸른 언덕이 펼쳐진 시기에는 생동감 넘치는 자연을 만날 수 있고, 풀이 갈색으로 변한 시기에는 이름 그대로 초콜릿을 닮은 특별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신비로운 언덕들에는 오래전부터 보홀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흥미로운 전설도 깃들어 있다.
그중 하나는 두 거인이 벌인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먼 옛날 두 거인이 서로 다투면서 커다란 돌과 흙덩이를 집어 던졌는데, 오랜 싸움 끝에 화해한 뒤에도 주변에 흩어진 흙덩이를 치우지 않고 떠났다고 한다. 그렇게 남겨진 수많은 흙덩이가 오늘날의 초콜릿 힐스가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거인의 슬픔에서 시작된다. 아로고(Arogo)라는 거인이 인간 여성 알로야(Aloya)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깊은 슬픔에 빠져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거인의 눈물이 땅에 떨어져 굳어지면서 수많은 언덕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하나는 거인들의 다툼에서,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서 비롯된 전설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독특한 언덕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해했던 사람들의 상상력과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과학이 언덕의 형성과정을 설명한다면, 전설은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과 문화를 전한다. 같은 풍경이라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이야기가 함께 펼쳐지는 것이다.
초콜릿 힐스는 필리핀에서도 중요한 자연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1988년 이 지역을 국가 지질기념물(National Geological Monument)로 지정했으며, 1997년에는 자연기념물로 보호하는 조치를 마련했다.
2023년에는 초콜릿 힐스를 포함한 보홀섬 일대가 '보홀섬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Bohol Island UNESCO Global Geopark)'으로 지정됐다. 세계지질공원은 지질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보전하면서 교육과 연구,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함께 추구하는 제도다.
초콜릿 힐스 역시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관광지를 넘어 지구의 역사와 지형의 형성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자연학습의 장소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주로 카르멘 지역의 전망대에서 언덕들을 감상한다. 높은 곳에 올라서면 수많은 둥근 언덕들이 시야 끝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가까이에서는 평범한 산처럼 보이던 언덕들도 멀리서 함께 바라보면 독특한 형태와 배열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햇빛이 비스듬히 비치는 시간에는 언덕마다 그림자가 생기면서 둥근 윤곽이 더욱 선명해진다. 언덕 사이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지형의 높낮이를 드러내고, 초록빛이나 갈색으로 물든 표면은 햇빛을 받아 조금씩 다른 색으로 빛난다.
화려한 건축물이나 특별한 장식 없이도 자연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다만 초콜릿 힐스의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지면서 자연경관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도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지형은 한 번 훼손되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광시설을 조성하거나 주변 토지를 이용할 때에도 자연유산의 가치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초콜릿 힐스의 모습은 오랜 시간 자연이 만들어낸 결과다. 바닷속에서 형성된 석회암이 육지로 드러나고, 수없이 내린 비와 흐르는 물이 암석을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지금의 둥근 언덕들이 만들어졌다.
그 위를 덮은 풀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라고 마르기를 반복한다. 언덕의 형태는 쉽게 달라지지 않지만, 표면의 색은 비와 햇빛에 따라 초록빛에서 갈색으로 변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지형 위로 해마다 새로운 계절의 풍경이 더해지는 것이다.
수많은 언덕은 멀리서 보면 서로 닮아 있지만, 가까이 살펴보면 크기와 높이, 곡선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같은 언덕도 계절과 햇빛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처럼 비슷해 보이는 모습 속에서도 저마다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필리핀 보홀섬에는 오늘도 둥근 언덕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비가 내리면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물들고, 건기가 찾아오면 다시 초콜릿빛으로 변한다. 오래전 바닷속에서 시작된 자연의 역사는 그렇게 계절을 따라 색을 바꾸며 지금도 보홀섬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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