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행군’ 서사 흔들리다… 해럴드 2세, 해상 이동 전략가였나
1066년 10월 14일 벌어진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는 잉글랜드의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으로 평가된다. 앵글로색슨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해롤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의 패배와 함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정복왕(William the Conqueror)이 새로운 지배자로 자리 잡으며 중세 영국의 정치·문화 질서가 재편됐다.
이 전투를 설명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서사는 ‘강행군(forced march)’이다. 해럴드 왕이 북부에서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를 물리친 직후 약 200마일(약 320km)에 이르는 거리를 단기간에 남하했고 그로 인한 피로가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는 해석이다. 이 서사는 오랫동안 교과서와 대중 역사서에서 반복되며 일종의 정설처럼 자리 잡아 왔다.
그러나 최근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학의 역사학자 톰 라이선스(Tom Licence) 교수 연구는 이 통설에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연구의 핵심은 단순하다. 해럴드의 이동이 과연 전적으로 ‘육로 강행군’이었는가에 대한 재검토다.
라이선스 교수는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의 기록 해석을 새롭게 제시한다. 기존에는 “배들이 집으로 돌아갔다(came home)”는 표현을 해럴드가 함대를 해산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 표현이 실제로는 각 지역으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런던이라는 정치적 중심지로 복귀했음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성립한다면 해럴드는 북부 전투 이후에도 해군력을 유지한 채 이동했을 가능성이 커진다. 즉, 남하 과정에서 일부 병력이나 지휘부가 해상을 활용했을 수 있으며, 이는 기존의 ‘지친 군대’라는 이미지와는 다른 전략적 판단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은 해럴드의 패배 원인에 대한 해석에도 변화를 요구한다. 지금까지는 장거리 행군으로 인한 피로 누적이 전투력 약화의 핵심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 그러나 해상 이동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패배의 원인은 보다 복합적인 요소—노르만 기병 운용, 궁병 전술, 전장 지형, 지휘 판단—로 재구성될 필요가 생겼다.
또한 이 연구는 1066년 전쟁을 ‘육지 중심 사건’으로만 이해해 온 기존 시각에도 균열을 낸다. 당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간 충돌은 해상 이동과 보급, 해안 방어가 중요한 변수였으며, 해럴드 역시 이를 인식하고 대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부각된다.
물론 이번 해석이 곧바로 새로운 정설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다만 중요한 점은, 1066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여전히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일한 사료라도 해석의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상이 도출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물의 성격과 전략, 그리고 패배의 의미까지 다시 쓰이게 된다.
결국 해럴드 2세는 단순히 ‘지쳐 패배한 왕’이 아니라 제한된 시간과 자원 속에서 복합적인 대응을 시도했던 통치자로 재조명되고 있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더 이상 고정된 결론이 아니라 사료와 해석의 변화에 따라 계속 갱신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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