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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을 함께한 사냥감, 기후 변화 앞에서 가장 먼저 흔들리다... 붉은다리자고새의 조용한 몰락

  • 권민정 기자
  • 입력 2025.12.31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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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벨치트에서 사진에 포착된 붉은다리자고새(Red-legged partridge, Alectoris rufa) [사진=Belxhite, Karel Van Rompaey]

 

유럽의 들판과 농경지를 오랫동안 지켜온 ‘붉은다리자고새(Red-legged partridge, Alectoris rufa)’는 지금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온 이 새는 한때 사냥의 상징이었고, 고대 유적에서조차 그 흔적이 발견될 만큼 인간의 역사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나무에 앉은 자고새’를 선물하던 관습은 풍요와 애정을 의미했지만, 오늘날에 이르면 그 상징은 아이러니하게도 위기의 출발점처럼 보인다.


붉은다리자고새는 오랜 세월 동안 유럽 전역에서 인기 있는 사냥감이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과도한 사냥은 물론, 트랙터와 같은 현대 농기계로 인한 사고, 농약 사용 증가로 인한 질병과 폐사, 농촌 인구 감소로 인한 서식지 관리 부재가 동시에 이 종을 압박했다. 여기에 사냥을 목적으로 인공 사육된 다른 자고새 종이 자연에 방사되면서 먹이와 서식지를 둘러싼 경쟁과 유전적 교란까지 겹쳤다.


이 같은 누적된 압력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에 따르면 붉은다리자고새는 현재 ‘멸종위기 직전(Near Threatened)’ 단계로 분류돼 있으며, 2010년부터 2020년 사이 유럽 전역에서 개체 수가 최대 40~45%까지 감소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단기간에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지만 감소 추세가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우려 요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모든 문제가 기후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바로 이 점이 더 큰 위험이라고 지적한다. 인간 활동으로 인해 이미 개체 수와 유전적 다양성이 크게 줄어든 종은 기후 변화라는 새로운 스트레스에 훨씬 취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는 유전체 연구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2021년 스웨덴과 이탈리아 연구진이 주도한 국제 공동연구팀은 붉은다리자고새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이 종이 과거 약 14만 년 전의 온난화 시기에도 번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기후가 따뜻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개체 수는 오히려 급감했고 그 이후 유전적 다양성은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채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같은 시기 기후 변화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개체 수와 낮지만 유지된 유전적 다양성을 보였던 일부 해양 포유류와는 대조적인 결과다. 붉은다리자고새는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종이라는 사실이 유전자 수준에서 확인된 셈이다.


문제는 지금의 상황이 과거보다 훨씬 불리하다는 점이다. 이미 인간 활동으로 개체 수가 급감한 상태에서 이상 고온과 가뭄, 서식지 변화 같은 기후 변화의 영향까지 겹치고 있다. 적응할 수 있는 유전적 여유는 줄어들었고, 회복할 시간 또한 충분하지 않다.


한때 인간의 식탁과 문화 속에서 풍요의 상징이었던 붉은다리자고새는 이제 농경지 생태계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지표종이 됐다. 연구자들과 보전 단체들은 이 종의 미래가 단순히 한 종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유럽 농촌 경관과 생물다양성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한다.


붉은다리자고새는 갑작스럽게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작은 상처가 쌓여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이 조용한 감소를 멈추지 않는다면 인간과 가장 오래 함께해온 새 중 하나는 어느 날 기록 속에서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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