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일본 화가가 그린 ‘염라대왕 정파리경도’ 다시 주목…전통 설화에 풍자와 유머 결합
지옥의 재판을 앞둔 한 여인이 거울 앞에 서 있다. 뒤에서는 염라대왕과 험상궂은 지옥의 존재들이 거울을 들여다보지만, 정작 거울에 나타난 것은 여인의 죄가 아니라 아름다운 얼굴이다.
일본 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Masterpieces of Japan’은 29일 공식 X 계정에 일본 화가 가와나베 교사이(河鍋暁斎·Kawanabe Kyōsai, 1831~1889)의 작품 ‘염라대왕 정파리경도(閻魔大王浄玻璃鏡図·A Beauty in Front of King Enma’s Mirror)’를 소개했다.
게시물에는 작품 제작 연도가 1887년으로 표기됐다. 다만 영국 왕립예술원(Royal Academy of Arts)과 관련 전시 자료에서는 제작 시기를 1871~1889년으로 보고 있으며, 1887년경 제작됐을 가능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작품은 비단에 먹과 채색, 금을 사용한 두루마리 그림으로 크기는 35.3×52㎝이며 현재 런던의 이스라엘 골드먼 컬렉션(Israel Goldman Collection)에 소장돼 있다.
작품의 핵심 소재는 염라대왕이 죽은 사람의 생전 행적을 살펴본다고 전해지는 ‘정파리경(浄玻璃鏡)’이다. 영국 왕립예술원이 2022년 교사이 전시에서 소개한 작품 해설에 따르면, 이 거울에는 원래 죽은 사람이 생전에 저지른 죄가 나타나야 하지만 그림 속에서는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만 비친다. 이를 바라보는 염라대왕 역시 예상 밖의 광경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엄숙한 지옥의 심판을 다루면서도 화면에는 공포보다 익살스러움이 먼저 드러난다. 커다란 칼을 든 지옥의 존재와 해골 같은 인물, 위압적인 모습의 염라대왕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표정과 몸짓은 과장돼 있다. 화면 오른쪽의 차분한 여인과 강한 대비를 이루면서 교사이 특유의 기묘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가와나베 교사이는 에도시대 말기에서 메이지시대에 걸쳐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다. 어린 시절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구니요시에게 그림을 배웠고 이후 가노파의 전통적인 회화 교육도 받았다. 동물과 요괴, 귀신, 해골부터 당대의 사회상과 서양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소재를 다뤘으며, 전통적인 회화 기법에 풍자와 해학을 결합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교사이가 활동했던 19세기 후반은 일본 사회가 막부 체제에서 메이지시대로 넘어가며 정치·사회·문화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해외와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서양의 문화와 생활방식이 빠르게 들어왔고, 교사이는 이러한 변화 역시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담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그의 작품에서 일본의 전통뿐 아니라 서구 문화의 유입과 사회 변화에 대한 풍자적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호쿠사이나 히로시게에 비해 해외 대중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교사이는 최근 국제 미술계에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 2022년 런던 왕립예술원은 ‘Kyōsai: The Israel Goldman Collection’전을 열어 그의 회화와 목판화, 삽화 등을 소개했다. 당시 일본대사관은 교사이를 19세기 일본에서 가장 흥미로운 화가 가운데 한 명으로 소개했다.
올해 일본에서도 교사이의 작품을 대규모로 선보이는 순회전이 이어지고 있다. 도쿄 산토리미술관은 지난 4월 22일부터 6월 21일까지 ‘골드먼 컬렉션 가와나베 교사이의 세계’를 개최했으며, 이후 고베시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7월 11일부터 9월 23일까지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오는 10월에는 시즈오카현립미술관으로 순회할 예정이다. 이번 X 게시물에 등장한 ‘염라대왕 정파리경도’ 역시 이스라엘 골드먼 컬렉션의 작품으로 올해 일본 전시에서 소개되고 있다.
최근 해외에서 교사이의 작품이 다시 관심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통적인 일본 회화와 대중적 상상력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표현방식이다. 연구기관과 전시 관계자들은 그의 재치 있고 역동적인 그림이 오늘날 만화와 현대 회화, 타투 등 다양한 시각문화에서도 주목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염라대왕 정파리경도’ 역시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한다는 무거운 이야기를 소재로 삼으면서도 염라대왕과 지옥의 존재들을 인간적인 표정으로 그려내고, 죄를 보여줘야 할 거울에 오히려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는 예상 밖의 장면을 만들어냈다.
공포와 유머, 전통적인 종교 이미지와 자유로운 상상력이 한 화면에서 만나는 이 작품은 19세기 일본 미술의 독특한 면모와 함께 가와나베 교사이가 오늘날 다시 평가받는 이유를 보여준다.
BEST 뉴스
-
자연과 전통을 아이들의 시선으로…제4회 청소년환경예술전 ‘Memory for Tomorrow’
▲2026 제4회 청소년환경예술전 [사진=셀리맘아트] 인공지능이 이미지와 예술작품까지 만들어내는 시대, 아이들은 미래에 무엇을 기억하고 남기고 싶어 할까. 자연과 생명,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청소년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제4회 청소년환경예술전 ‘Memory for Tomorrow’가 서... -
[현장] 제4회 청소년환경예술전 《Memory for Tomorrow》, 청소년들이 지키고 싶은 것들에 대하여
▲2026 제4회 청소년환경예술전 1층에 전시된 작품들 [사진=ESG코리아뉴스] 사라져가는 자연과 생명, 잊혀가는 전통과 문화를 예술로 기억하고 미래로 이어가려는 청소년들의 시선이 한자리에 모였다. ‘2026 제4회 청소년환경예술전 《Memory for Tomorrow》’ 개막식... -
[문화의 현장] 이경미 박사가 기획한 ‘도시시작’…평창동의 길, 몸으로 다시 만나다
▲ 이경미 박사가 기획한 ‘도시시작’ 평창동의 길, 몸으로 다시 만나다중 가나아트센터 계단에서의 머포먼스 모습. [사진=이경미 박사 제공] 늘 걷던 길도 걷는 방식을 바꾸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계단에서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고, 손끝으로 산등성이의 선을 따라가며, 오... -
[초콜릿, 문명을 만나다 ①] 초콜릿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마야 신화 속 카카오
[편집자주] 〈초콜릿, 문명을 만나다〉는 한국초콜릿연구소뮤지엄의 전시와 소장 자료를 따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초콜릿의 뿌리를 찾아가는 ESG코리아뉴스의 기획연재이다. 카카오의 기원에서 출발해 마야의 신화와 문화, 아즈텍 사회의 카카오, 유럽으로 건너간 뒤 달라진 초콜릿, 오늘날 한 조각의 초콜릿... -
[갤러리] 청년 환경예술가 오유나의 'Fragments of Self'
▲오유나 作, Fragments of Self [사진=오유나] 〈Fragments of Self〉를 처음 구상했을 때 저는 무의식과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모습의 ‘나’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나의 얼굴만으로는 경험과 기억,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저 자신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여러... -
[초콜릿, 문명을 만나다 ②] 카카오는 왜 ‘신의 선물’이 됐을까…아즈텍 신화(Aztec Mythology)와 케찰코아틀(Quetzalcoatl)
[편집자주] 〈초콜릿, 문명을 만나다〉는 '한국초콜릿연구소뮤지엄'의 전시와 소장 자료를 따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초콜릿의 뿌리를 찾아가는 ESG코리아뉴스의 기획연재이다. 1편에서는 약 5,300년 전 남미 상부 아마존에서 확인된 카카오 이용의 흔적과 마야 문명에서 카카오가 음식과 의례, 신화적 세계관 속에...
전체댓글 0
NEWS TOP 5
실시간뉴스
추천뉴스
사람들
more +-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①] “내가 맡긴 돈은 어디로 갈까”…이상진 대표가 그리는 가치금융의 미래
[편집자 주] 세상의 변화는 익숙한 현실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로... -
인류의 달 착륙 뒤에 있었던 여성 과학자…마거릿 해밀턴, 90세로 별세
1969년 7월 20일, 인류가 처음 달에 발을 내디딘 역사적인 순간에는 보이지 ... -
오바마 “책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꾼다”…인생 바꾼 6권 다시 읽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책들을 다시 펼친다... -
UN 인권사무소, 말리 원주민 지도자 우무 디코 조명… “기후 정의와 원주민 권리 향상에 앞장”
유엔 인권사무소(UN Human Rights)가 7일 저녁 공식 X 계정을 통해 말리 출...
오피니언
more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⑳] 치유산업, 농촌의 미래를 바꾸는 새로운 성장동력
현대사회에서 건강과 행복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 -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㉝ CP 우수기업 인센티브 활용 전략: 혜택을 넘어 기업 가치 상승의 엔진으로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CP) 등급평가에서 AA 이상의 우수 등급을 획득한... -
[강윤영의 사람을 살리는 콘텐츠] ② 불안의 시대,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정보를 만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 -
[이경미의 AI와 미래공간 ①] AI가 바꾸는 공간, 인간의 삶
사무실 책상에 앉아 인공지능(AI)과 함께 제안서를 작성하는 풍경은 이...
기획 / 탐방
more +-
[ESG탐방] 농업 생산지가 관광 자원으로… 홋카이도 ‘패치워크 로드’와 ‘팜 토미타’가 보여준 농촌 경관의 가치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의 ‘패치워크 로드’와 나카후라노의 ‘팜 토미... -
[ESG탐방] 화산 지질이 만든 지하수의 흐름… 비에이 ‘시로가네 폭포’가 보여준 자연자산의 가치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정의 시로가네 온천 지역에는 화산 지질과 지하수가 ... -
[ESG탐방] 방재시설에서 관광자원으로... 자연과 함께 만들어진 홋카이도 비에이 ‘청의 호수’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정에 위치한 청의 호수(아오이이케·青い池)는 처... -
[ESG탐방] 아사히카와 디자인센터, 지역 산업을 지속가능한 자산으로 연결
일본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는 가구와 목공산업이 발달한 도시다. 홋카이도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