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리보다 무서운 기상이변, 흔들리는 가을걷이와 식량안보
- 절기를 읽는 농업에서 기후정보를 활용하는 농업으로
서리가 내리는 상강,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계절
10월 23일은 24절기 가운데 열여덟 번째인 상강(霜降)이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뜻으로,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고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다. 예로부터 농촌에서는 벼와 잡곡을 수확하고 감과 밤 등 가을 과실을 거두며 한 해 농사를 마무리했다. 자연의 변화를 읽고 그에 맞춰 농사일을 조절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상강이라는 절기에 담겨 있다.
그러나 오늘날 농촌에서 상강의 의미는 예전과 같지 않다. 절기의 날짜는 그대로지만, 그 무렵의 기온과 강수, 서리가 내리는 시점은 달라지고 있다. 기후변화로 농작물의 생육과 수확 시기가 변하고, 수확철 집중호우와 가뭄, 이상고온 등 기상이변이 농업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 농사를 지어온 전통적인 방식만으로는 변화하는 기후에 대응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따뜻해진 가을, 흔들리는 농업의 경제성
기후변화는 농업 생산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기상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기후변화 분석에 따르면, 최근 30년(1991~2020년)의 연평균 기온은 과거 30년(1912~1940년)보다 1.6℃ 상승했다. 계절의 길이와 기온 분포가 달라지면서 농작물의 재배 적지와 생육 조건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따뜻해진 가을이 농업에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작물의 성숙 시기가 달라지고 병해충의 발생과 월동 조건이 변할 수 있다. 수확을 앞두고 집중호우가 내리면 농경지가 침수되고 작물이 쓰러지며 과실의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 반대로 가뭄이 길어지면 농업용수 확보가 어려워지고 생산비 부담이 커진다. 기온 상승과 강수 패턴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농민은 수확량과 품질을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이러한 피해는 농가의 소득 감소에서 끝나지 않는다. 농산물 생산량이 줄거나 품질이 떨어지면 시장 공급과 가격이 영향을 받고, 소비자의 장바구니 물가에도 부담이 전가된다. 기후위기는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공급망, 지역경제, 국민의 먹거리와 직결된 경제적 위험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주요 곡물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국제적인 기상이변이 주요 생산국의 수확량을 감소시키거나 전쟁과 물류 차질이 겹치면 국내 식량 공급과 가격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국내 농업의 생산 기반을 지키는 일은 농촌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 국가 경제의 회복력과 식량안보를 확보하는 과제다.
기후위기 시대, 농업에도 ESG가 필요하다
ESG는 기업의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요소를 경영에 반영하는 개념이다. 이제 ESG는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평가하는 기준을 넘어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중요한 틀로 자리 잡고 있다. 농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환경에 크게 의존하고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진다는 점에서 ESG의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
먼저 환경(E) 측면에서는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적응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농업 부문의 탄소 배출을 줄이는 노력은 중요하지만, 이미 진행 중인 기후변화로부터 생산 기반을 보호하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물 절약형 재배기술, 토양 관리, 정밀한 농업용수 공급, 기후적응형 품종 개발, 병해충 예측과 친환경 방제 등을 확대해야 한다. 탄소중립과 기후재해 대응은 서로 대체하는 정책이 아니라 함께 추진해야 할 과제다.
사회(S) 측면에서는 기후재해의 부담을 농민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이상기후에 따른 농작물 피해는 농가의 생계와 지역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농작물재해보험의 실효성을 높이고, 피해조사와 복구 지원을 신속하게 하며, 소규모 농가와 고령 농업인도 기후정보와 대응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농업인의 안전과 소득을 지키는 것은 농촌 공동체를 유지하고 안정적인 먹거리 공급을 보장하는 사회적 책임이다.
지배구조(G) 측면에서는 농업 관련 정책과 기업의 의사결정에 기후위험을 체계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정부는 농업기상정보와 재해위험 정보를 관련 기관 및 지방자치단체와 공유하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농업 기반시설과 적응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농산물 유통·가공·급식 기업도 공급망의 기후위험을 점검하고, 생산자와의 협력을 통해 원료 조달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정책의 투명성, 책임 있는 의사결정, 이해관계자 간 협력은 지속가능한 농업을 뒷받침하는 핵심 조건이다.
절기를 읽는 농업에서 기후위험을 관리하는 농업으로
과거 농민들은 절기와 경험을 바탕으로 파종과 수확 시기를 결정했다. 이제는 이러한 지혜에 과학적인 기후정보를 결합해야 한다. 지역별 서리 발생 가능성, 집중호우와 가뭄 위험, 작물별 생육 상황을 분석해 농민이 실제 영농활동에 활용할 수 있는 맞춤형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생육 예측, 병해충 조기경보, 농업용수 관리도 기후위험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후정보를 생산하는 기관과 농업기술을 개발하는 기관, 현장에서 농민을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와 농업기술센터, 농업 기반시설을 관리하는 기관 간 협력이 필요하다. 정보를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농민의 의사결정과 현장 대응으로 이어지는 전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기후정보가 실제 피해를 줄이고 농가소득을 보호할 때 비로소 그 경제적·사회적 가치가 실현된다.
기업의 ESG 경영도 농업과의 연결을 강화해야 한다. 식품기업과 유통기업은 원료 농산물의 기후위험을 공급망 관리에 반영하고, 농가와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기후위기에 강한 생산기반을 조성하고 지속가능한 농업에 투자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인 동시에 장기적인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는 경영 전략이다.
상강은 한 해 농사의 결실을 돌아보고 겨울을 준비하는 절기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겨울만이 아니다. 다음 해의 파종과 생육, 수확까지 이어지는 농업의 전 과정을 기후위험의 관점에서 다시 설계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농업은 농민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정부의 책임 있는 정책, 기업의 ESG 경영, 과학기술의 발전, 소비자의 관심과 사회적 연대가 함께해야 한다. 환경을 지키고 농업인의 삶을 보호하며 책임 있는 의사결정 구조를 만드는 것이 ESG가 농업에서 실천해야 할 핵심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식량안보는 얼마나 많은 곡물을 수입할 수 있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상이변 속에서도 국내 농업이 안정적으로 생산을 이어가고, 농민이 지속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절기는 그대로지만 농사의 시계는 달라지고 있다. 이제 ESG를 통해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기후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식량 생산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농업을 지키고 미래 세대의 식탁을 책임지는 길이다.
덧붙이는 글 ㅣ 남재철 (서울대학교 특임교수, 前 기상청장)

기상청장을 역임하며 국가 기후 관측과 재해 대응 정책을 총괄했다. 국립기상과학원장, 수도권기상청장, 기상청 차장 등을 거치며 기상·기후 분야 전반에서 정책과 연구를 수행해 왔다. 세계기상기구(WMO) 집행이사 및 대기과학위원회 부의장을 맡아 국제 기후 협력에도 참여했다.
마르쿠스 Who’s Who 과학기술인명사전에 등재된 바 있으며,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6번째 대멸종 시그널, 식량 전쟁』의 저자이며, 현재 기후변화 대응, 기상재해, 식량안보 분야에서 연구와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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