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금싸라기 땅에 녹색 섬으로 남아있는 선정릉을 산책하며

당대의 역사에서 지금의 나를,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차근차근 또 조목조목 생각해 볼 일이다.

이곳이 남겨둔 과제가 먹구름처럼 내려앉는다.”

 

1 (2).jpg
▲ 선릉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신로와 어로 [사진=주복매]

 

가을 색 짙어지는 시월의 끝자락, 서울 강남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선정릉으로 향했다. 선릉은 조선 9대 성종 대왕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이고, 정릉은 성종의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 대왕의 유택(幽宅)이다. 팔만여 평의 도심 속 녹색 섬인 선정릉은 삼십여 년 전 내 기억 속의 어둡고 우중충했던 모습을 환골탈태하여 환하고 그윽하게 나를 맞이했다.

 

산책로를 따라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을 지나, 본격적으로 제향 의식이 시작되는 홍살문에 이르렀다. 성종 대왕과 정현왕후의 능은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이다.

 

홍살문에서부터 왕과 왕비의 혼령과 생존의 왕이 만나곤 했던 정자각까지 박석 깔린 돌길이 쭉 뻗어있다.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로(神路=香路)이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이다. 어로의 중간쯤에 이르면 좌우에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데우는 수라간(水刺間)과 왕릉 관리자가 머무는 수복방(守僕房)이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선이 공존하더니 정자각을 지나며 분리된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모신 산 자는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에서 신로(神路)를 통해 능침까지 올라간다. 죽은 자의 공간인 능침 공간은 정자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서, 성종대왕릉과 정현왕후릉까지 어로(御路)는 버리고 신로(神路)만 남아, 각각 홀로 능까지 나아간다.

 

성종대왕릉.jpg
▲ 성종대왕릉 [사진=주복매]

 

예종이 즉위 1년 2개월 만에 급서하자, 차기 국왕 결정권을 가진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는 세조의 장남 의경 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국왕 승계 순위로 보면, 예종의 장남 제안 대군이 1순위, 의경 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이 2순위였고, 의경 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은 3순위에 있었다.

 

자을산군의 즉위 다음 날 예종의 아들인 제안 대군의 호칭을 원자에서 왕자로 격하시켰다. 원자는 차기 왕위 계승자로 나이가 조금 더 먹으면 세자가 되고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즉위하는 신분이었다. 제안 대군은 어리고, 월산대군은 병약하여 자을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성종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사림을 육성함으로써, 왕이 될 수 없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한명회 등의 공신(훈구)을 견제하기도 하고, 왕권 유지를 위해 공신과 타협하기도 하는 유연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성종은 즉위 후 7여 년간에 걸친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親政)체제가 되면서부터 대비와 공신들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성종은 대비인 정희왕후와 공신들의 반대를 꺾고 친아버지인 의경 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부묘(祔廟)함으로써 독자적인 왕권을 사수했다. 왕권과 훈구, 사림은 경복궁 근정전 앞에 놓은 세 발 달린 향로(, )처럼 균형을 유지했다.

 

선정릉3궁궐 속의 순한 사연들처럼 풀꽃들이 일렁인다. 촬영=윤재훈.jpg
▲ 풀꽃 같은 궁중 비사들 [사진=주복매]

  

 그러나, 궁중 내부의 여성 문제에서는 이런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인수대비는 남편(의경세자, 덕종)이 요절하자 청상의 몸으로 궁궐에서 나와 덕수궁의 중화전에서 살았다. 중화전 뒤의 백골집 석어당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인수대비의 시동생인 예종이 승하하면서 차남 자을산군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인수대비는 장남 월산대군을 남겨두고 차남 자을산군(성종)과 함께 궁궐로 재입성했다.

 

효심 지극한 성종은 태종이 상왕 때 거처하던 수강궁을 확장하여 정희대비, 인수대비, 인혜대비가 거처할 궁궐인 창경궁을 지었다. 공사 중 정희대비(세조비)는 승하하고, 1485(성종 16) 5, 인수대비와 인혜대비(예종비 안순왕후)가 창경궁에 이어하였다.

친정(親政)체제로 전환된 1476년 그해 8, 숙의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고, 11월 바로 연산군을 얻었다. 야사에 성종을 晝堯舜(주요순) 夜桀紂(야걸주)’라 이른다.

 

낮에는 요순처럼 성군이나

밤에는 酒池肉林(주지육림)의 고사를 만든 ()나라의 걸왕이나 

()나라의 주왕처럼 화려한 호색가였다는 것이다. ”

 

여성 편력으로 성종은 왕비 윤씨와 자주 충돌했다. 성종은 왕비를 폐출시키기로 작정하고, 칠거지악 중,

 

말이 많으면 버린다.

 순종치 않으면 버린다.

 질투하면 버린다.”

 

등을 거론하며 대신들에게 동조해 줄 것을 강요했다. 대궐에 여러 명의 대비가 있었던 게 사태를 악화시켰다.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친어머니 인수대비 한씨, 예종비 안순왕후 한씨의 세 대비는 삼전(三殿)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사건을 가라앉히기보다 악화시키기 일쑤였다.

 

선정릉4성종릉의 정자각 앞에 연인들.촬영=윤재훈.jpg
▲ 도심 속의 녹색 섬 [사진=주복매]

 

궁중 여인들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성종의 감정을 대비들이 이용하며 연산의 생모 왕비 윤씨 폐출을 부추겼다. 그중에서도 성종의 친모인 인수대비가 왕비를 가장 강하게 압박했다. 인수대비는 대신들을 불러 왕비를 비난했다.

  

하물며 제후는 아홉 여자를 거느리는 것인데 지금은 그 수가 차지 않았으니,

어찌 한 나라의 어머니로서 의범(儀範)이 되어야 하는데,

이와 같아서 되겠는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기 때문에 경들을 불러 의논하는 바이다.

중궁이 이미 국모가 되었고 또한 원자가 있는데,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

                                                                      (성종실록 8329)

 

성종이 왕비 윤씨를 비난하고 인수대비가 며느리를 질책하며 쫓아내야 한다고 함에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통한하지 않는 이가 없다<성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일반 사대부들은 물론 백성들의 민심도 윤씨를 동정했다.

 

치우침 없는 정치력으로 정사를 살폈던 성종이건만 여성 문제에서는 타협을 몰랐다. 끝내 고집스럽게 왕비를 폐서인되게 함은 물론 국모를 사사함으로써 왕권을 흔들리게 하는 불씨를 남겨두고 말았다. 왕위를 계승했던 세자 연산은 물론 연산의 자녀 4명까지도 자신의 차남이며 연산의 이복동생인 중종에 의해 몰살당했음을 성종은 알고 있을까?

 

선정릉5성종릉 앞의 흐드러진 철쭉들.촬영=윤재훈.jpg
▲성종릉 앞의 흐드러진 철쭉들 [사진=윤재훈]

   

성종은 성리학의 윤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한문으로 된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보급하였으며, <소학> 읽기를 장려하였다. 인수대비는 조선의 여성들에게 성리학적 여성관을 심어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내훈>을 펴냈다

인수대비는 <내훈>,

 

비록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원망하거나 한탄할 수 있겠는가?

남편이란 자리는 당연히 존귀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다

 

며느리에게 가르친 연후에도 듣지 않으면 화를 낼 것이요,

화를 내고 꾸짖은 연후에도 듣지 않으면 매를 때릴 것인데,

누차 때렸는데도 고쳐지지 않으면 며느리를 쫓아낼 것이다

 

라고 썼다. 정자각을 지나 선릉에 이르는 산책길에 단풍나무가 즐비하다. 단풍나무의 꽃말은 사양, 은둔, 자제라 한다. 산책로를 걷는 마음 한구석이 복잡하고 어지럽다. 성리학적 윤리관을 계승한 제사 등 풍속에 대한 회피, 남아 선호의 폐해, 남편이나 시집의 며느리 멸시나 학대 및 높은 이혼율, 인구 감소 현상, 결혼 기피 현상, 가부장제의 허점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야기되는 그 지점에 오늘의 내가 서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는 요즘이다.

 

성종은 효자였을까? 마마보이였을까

조선 시대 내명부 수장인 국모는 아들로 대를 잇고 최후에 왕과 함께 잠든 왕후를 말하는 것인가?

 

금싸라기 땅에 녹색 섬으로 남아있는 선정릉을 산책하며

당대의 역사에서 지금의 나를,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차근차근 또 조목조목 생각해 볼 일이다.

이곳이 남겨둔 과제가 먹구름처럼 내려앉는다.

 

 

 

덧붙이는 글 I 주복매 

건국대학교 국문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과 석사를 마쳤습니다. 숭신여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를 수료했습니다. 지금은 서울의 역사를 알고자 곳곳을 탐방하고 있습니다

전체댓글 2

  • 50950
정충영

왕비의 관점에서 쓴 글이 흥미진진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댓글 (0)
김혜경

도심속의 왕릉, 선정릉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됐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댓글 (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주복매] 신들의 정원, 선정릉에서 노닐다 ①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