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2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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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냐의 환경운동가 왕가리 무타 마타이(Wangari Muta Maathai) [사진 그래픽=ESG코리아뉴스]

 

왕가리 무타 마타이(Wangari Muta Maathai, 194041~2011925)는 케냐의 환경운동가, 정치인, 대학 교수이다. 그녀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민주주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프리카 여성 처음으로 200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녀는 그린벨트 운동(The Green Belt Movement), 불굴: 회상록(Unbowed: A Memoir), 아프리카를 위한 도전(The Challenge for Africa), 지구 재충전( Replenishing the Earth) 등 네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녀가 추구했던 그린벨트 운동은 여러 책에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2008년 말보로 프로덕션에서 뿌리 내리기: 왕가리 마타이의 비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왕가리 마타이는 194041일 아프리카 케냐의 시골 지역인 니에리(Nyeri)에서 태어났다. 당시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그녀의 가족은 그곳에서 여러 세대를 걸쳐 살았다. 그녀는 케냐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민족 키쿠유 족의 딸로 태어났다.

 

케냐가 영국 식민지 지배로 부터 벗어날 시기 톰 엠보야를 비롯한 케냐의 정치인은 우수한 학생들에게 서구식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의 상원 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도 케냐의 정책을 지지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마타이는 약 300명의 장학생 중 가운데 한 명이 되어 19609월 미국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1964년 캔자스 주 애치슨에 있는 마운트 세인트 스콜라스티카 칼리지(Mount St. Scholastica College)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과학 대학(University of Science)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녀가 1966년 피츠버그(Pittsburgh)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 전에 독일과 나이로비 대학에서 박사 과정도 밟았다. 1971년에 나이로비 대학의 해부학 교수로 임명되어 학장까지 역임했다. 그녀는 2002년 예일 대학교의 지속 가능한 삼림을 위한 국제 학회 객원 교수(Visiting Fellow) 초청 자격을 얻었다.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 여성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마타이 교수는 1976년과 1977년에 각각 수의학과 교수와 부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이 지역에서 해당 직위를 얻게 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케냐의 산림이 불과 몇 년 만에 크게 훼손되어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정부가 산업용 경작지를 넓히려고 나무를 벌채한 탓에 어린 시절 자신과 함께했던 울창한 숲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린벨트 복원을 위해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것은 여러분의 땅입니다. 여러분의 땅인데도 여러분은 이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땅이 황폐해지는 것을 보고만 있는데 여러분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라며 그린벨트 운동 동참에 호소했다.

 

그녀는 정부 탓만 하지 말고, 불평을 넘어 행동으로 이 상황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그녀의 간절한 호소와 설득은 마을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자연을 지키는 일에 동참하는 녹색 투사로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이 케냐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마마미티(나무들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은 가난한 여성들이었다.

 

그녀는 파괴된 산림을 회복하기 위해 197765일 무화과나무 등 7그루를 심으며 산림녹화 운동을 처음 시작했다. 또한 1977년 사막화 방지를 위해 전국에 1,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그린벨트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나무 심기 운동은 30년간 이어지면서 3,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내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녀가 환경운동을 시작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4,5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그녀는 케냐의 산림이 파괴된 것은 자연의 훼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도 망가뜨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과 함께 살아온 숲이 없어지면 산사태가 일어나고, 수원도 말라버린다는 것이었다.

 

산림의 파괴로 여성들은 점점 더 먼 곳으로 물을 찾아 나갔으며 나무가 없어지자 땔감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자연에 서식하는 동물들은 먹이가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어가고 사람들은 식량부족 사태에 시달렸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자연의 복원뿐이었다.

 

그녀는 녹색 운동을 통해 여성들이 자연을 회복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그녀의 그린벨트 운동은 단순히 나무를 심는 것뿐 아니라, 여성의 인권, 학대와 무기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용기와 긍지를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케냐의 미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모두가 노력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마타이는 케냐 국립 여성 협회(Maendeleo Ya Wanawake) 의장을 지냈으며, 1997년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정당이 그녀의 입후보를 철회하면서 불발되었다.

 

그녀는 다니엘 아랍 모이 정권 때 공정한 선거 요구와 부패 종식, 인종 정치 청산을 요구하다 여러 차례 수감되기도 했다.

 

그녀는 모이 대통령과 사업 제휴를 맺은 회사들이 60층 규모의 케냐 타임스 미디어 트러스트 복합 단지 건설을 시도하자 이것을 막기 위해 사회 운동을 하였으며, 마침내 나이로비의 우후루 공원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마타이는 음와이 키바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2002년 총선에서 의원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으며 2003년부터 2011년까지 환경부, 천연 자원부, 야생 동물부 차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그녀는 2003년에 케냐 마진기라 녹색당을 창당했다.

 

2004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마타이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노벨 위원회는 그녀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는데, 그 이유는 마타이가 케냐에서 과거 압제적인 정권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일어섰고 그녀의 행동이 국가적, 국제적, 정치적 압박으로 부터 저항하는데 기여했으며, 민주주의와 권리 특히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많은 투쟁을 한 공헌이 인정되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1984Right Livelihood Award (a.k.a. "Alternative Nobel Prize"), 1991년 골드만 환경상, 1991년 아프리카 상, 1993Edingburg Medal (for "Outstanding contribution to Humanity through Science"), 2004Petra Kelly Prize, 2004년 Sophie Prize, 200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왕가리 마타이는 미래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바로 지금 이순간에 탄생합니다. 장래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면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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